2009년 6월 16일 화요일

2009년 5월 29일

어제 오후 서둘러 구입한 검은 웃옷과 새 구두 차림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노 전 대통령님의 영결식 행사요원 차출에 응하고 경복궁 동문쪽 출입구 물품보관팀에 배치받았다. 영결식 참가자 분들이 비표를 달고 검색대를 통과하기 전에 반입불가능하다고 지정된 음식, 물병, 양산, 큰 가방 등을 물품보관소에 맡기도록 미리 안내가 되어 있다고 했다. 이미 어제 오전에 행사진행 교육을 받고 같은 팀과 함께 현장 답사를 다녀왔었다. 그때 조성 중이던 영정 주변 모습은 넓은 흰색 공백 속에 그분의 모습만 덩그러니 보이던 터라 쓸쓸해 보였다. 보고 있던 내 마음이 쓸쓸했던 탓일지도.

 

당일 - 29일 - 아침 7시 반경 통과하면서는 흰 색 국화와 노란 색 포춘샬츠만 호접란 - 친구의 블로그에서 배움 - 으로 빼곡히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경복궁 동문은 지하철 안국역에서 가까웠는데, 경복궁역보다는 도보 입장객이 적었을 수는 있으나 봉하마을 등에서 오는 단체버스 주차장이 있어 일이 몰릴까 봐서 약간 걱정되기도 했기에 팀원들이 보관표를 각각 나누어 한 사람에 200 장 넘게 번호를 미리 써 두고 기다렸다. 하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씨였던 지라 냉커피, 얼음물병, 양산을 맡기는 분이 특히 많았다.

 

1차로 봉하마을에서 온 버스는 한꺼번에 여러 대가 들어왔지만, 미리 버스 안에서 비표를 다셨고 웬만한 짐도 버스 안에 놓아 두고 미리미리 내려 입장을 마치신 터라 그렇게 심하게 몰리지 않았다. 다만 그 후에 도착한 H모당 국회의원 단체 버스의 경우는 영결식 시작이 임박한 11시까지 입장을 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서서 잡담하고 웃기도 하는 모습이 절로 눈쌀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가 없더군. 의원들 얼굴과 이름을 평소에 좀 더 공부해 둘 걸 하고 후회했다. 봉하마을에서 온 버스와 H모당 대절버스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는 쓴웃음도 조금. 그러나 꺼칠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입장한 박영선 의원이라든가 진중한 표정으로 훌쩍 들어간 이상봉 디자이너라든가는 그들과는 다른 인상을 남겨주었다.

 

11시 경.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입장을 마치셨기에 당분간은 더 할 일이 없었고 임무를 마친 행사요원은 영결식장에 착석도록 되어 있기도 했기에 나와 다른 한 분은 다른 팀 분들의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오른쪽 뒤편에 앉았다. 내 앞쪽 몇 줄에는 몹시 슬퍼하시는 분들이 서너 분 계셔서 나도 더욱 숙연해졌고 무엇보다도 영정차량과 봉하마을 2차 버스가 들어오면서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분이 가셨다는 게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실감-이라기보다는 이마를 후려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후에 진행되던 식에서는, 한 명숙 전 총리님의 조사와,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의식 말고는 왠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의식을 위한 의식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참석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돌아다니며, 울고 있는 분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는 기자들도 참 보기 싫었다.

 

그러던 중... 가족의 헌화에 이어 현 대통령 헌화 직전에 일어났던 일들은 어쩌면 현장 뒤쪽에 앉아 있던 나보다도, 여기저기 뉴스에 실린 사진을 보신 분들이 더 상황을 가까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뒤쪽 중앙에 마련된 사진기자단이 일제히 대포렌즈를 낀 사진기 수십 여 대로 사진을 찍는 소리는 소나기가 오는 것 같더군. 당시 백원우 의원의 "사과하라!" 는 외침은 무슨 소리인지 내가 있던 곳까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 직후 우리가 있던 앞쪽에서도 군데군데 동조의 외침이 터져 나왔고 제압당하던 백 의원을 놓아주라는 외침도 들렸다. 이때 나와 함께 있던 분은 나보다 더 놀라셨던 것 같다. 우리는 일단 물품보관소로 돌아가자는 판단을 내리고 방송사 천막의 아나운서 뒤를 지나, 해금연주자 분의 뒤를 지나, 뭉쳐 서 있던 사복요원 뒤를 지나 근근이 돌아왔다. 그 후엔 근처에 있던 다른 경찰들과 멀리서 영정 차가 다시 동문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 보고, 식이 끝난 후엔 맡았던 물품을 주인들께 돌려 드렸다. 안 찾아 간 양산 몇 개와 음식물을 행사본부에 넘기고서야 일이 끝났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난 발이 너무나 아파서 노제라든가 행진 참여는 도저히 불가능.

 

남은 물품을 경복궁 서문 쪽의 본부로 넘기러 가던 길에 행사가 끝난 후에도 얼마간은 헌화를 할 수 있게 해 주길래, 처음으로 그 분께 헌화했다.

 

부디 편히 쉬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지금 우리 사회 온도는 몇도씨?

100℃ - 10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방금도 온라인에서 이 만화를 보고... 끝에는 결국 울고 말았다.
그러나 우는 걸로 끝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눈물로, 마음으로 함께 우는 사람은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PDS/minju2_MediaPDS_view.asp?bid=pds_vod&num=54&page=1&od=&ky=&sh= 이 곳이 원 출처이고, 여기 가시면 본 책의 전문을 볼 수 있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2009년 6월 5일 금요일

당신의 글씨


어떤 경로로 이 말씀이 당신의 대표말씀으로 대통령기록관 벽에 남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누군가에게 물어보아 알아낼 수는 있겠지요.
번영으로 가기 위하여 평화를 다지는 길을 가라고 하시나요?
당신이 말씀하시는 평화가 그저 백의를 차려입고 맥없이 다른 이들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는 아니라 믿어요.
평화란 사실 굉장히 많은 신경과 긴장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달성할 수 있는 고도로 안정되고 균형잡힌 상태가 아닐까요-

아무튼 당신의 글씨와 사진을 보고 있자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깊어지던 어제였습니다.